그림일기 #109: 연필과 붓(pencil & bru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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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에서
Moody Blues의 Melancholy Man과
Nights in White Satin을
이어달리기처럼 연속으로 들려준다.
비도 오고 분위기 좋고
이나영 믹스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서서
유리창 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지난 시절 어느 순간 속으로
훅~ 빨려 들어가
상념에 잠겼다.
3년간 불처럼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졌던 그 날은
술에 잔뜩 취해
소유하고 있던
4B연필과 아크릴 붓을
모두 부려뜨렸다.
그림으로 만났던
사람이라서 일까?
그래서 두 번 다시는
연필을 들지 않겠다고
그녀를 만나면서 그렸던
그림들을 발기발기 찢으며
괴로워하고 자학했었는데,
사귀었던 세월만큼의
시간이 흘려 흘려
그 아픔이 어느 정도 아물 적에
또 다른 사랑을 만나
특별한 생일 선물을 선사하기 위해
생뚱맞게 연필을 쥐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비가 와도,
사랑을 또다시 빗물에 흘려보내도
이젠 연필과 붓을 매개체로
만남도 이별도 하지 않을 정도로
제법 성숙해져 있다고
아주 얄팍하게
병신같지만 멋지게
깔끔하게 시건방지게
은밀하게 위대하게
말 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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