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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사랑하며 #377: 서울둘레길(SeoulDullegil) 8-4코스 북한산 흰구름길 '빨래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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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무수리들이 
빨래터와 휴식처로 이용했다는 
빨래빨래 빨래골

느낌~ 알잖아!

어쩐지 참 많이 와 본 것 같더라!

그러니까 나님
슬기로운 걷기 생활
재미있는 걷기 생활
즐거운 산책 생활을 하는
물이 좋아 산이 좋아 검은띠 산타는아저띠가
백만년 전 전생에는
여기에 놀려와서 
꼭. 빨래를 했었다는거지!^^

큰 일로는 물을 길어나르거나
작은 일로는 
이것저것 다하는 
무수리 알지? 

경주김씨는 
개뿔..

 

북한산 흰구름길
걷고 사랑하며 #377: 서울둘레길(SeoulDullegil) 8-4코스 북한산 흰구름길
북한산 흰구름길
걷고 사랑하며 #377: 서울둘레길(SeoulDullegil) 8-4코스 북한산 흰구름길
북한산 흰구름길 빨래터
걷고 사랑하며 #377: 서울둘레길(SeoulDullegil) 8-4코스 북한산 흰구름길 '빨래골'
북한산 흰구름길 빨래터
걷고 사랑하며 #377: 서울둘레길(SeoulDullegil) 8-4코스 북한산 흰구름길 '빨래골'

 


서울둘레길(SeoulTrail) 8코스 북한산 
https://gil.seoul.go.kr/walk/course/dulae_gil.jsp?c_idx=8#detail

 

서울둘레길 | 둘레길 코스

8코스는 북한산 둘레길을 이용해 통과하는 노선으로 이미 개통이 된 곳으로 이용하여 정비가 잘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경사가 급하진 않지만 약간의 코스에서 어려움이 있다. 또한 산 코스임에

gil.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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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골>
빨래골이 위치한 수유동은 옛부터 북한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많아 '무너미'라 불려졌습니다.
무너미란 저수지 물을 저장하게 위해 뚝을 쌓아 놓고 
한쪽의 뚝을 조금 낮추어 물이 넘쳐서 흐르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맑고 깨끗한 물이 넘쳐 자연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당시 대궐의 무수리들이 빨래터와 휴식처로 이용하면서 
'빨래골'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습니다.
당시 무수리라는 궁 근처의 청계천에서 빨래를 하였습니다.
궁에서 나오는 빨래는 하루에도 어마어마 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많은 빨랫감 중 은밀한 빨랫감(속옷 등)은 다른 아낙들과 섞이지 않도록 
궁궐과 많이 떨어지 이곳에서 빨래를 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무수리들은 빨래를 하던 먼 이곳까지 나온 김에 
휴양까지 하고 가는 등 빨래골은 궁과는 독립적인 공간으로 많이 활용되었습니다.
북한산둘레길(흰구름길)의 자락에 있는 이 빨래골은 답답하고 엄격한 궁을 떠나
맑고 깨끗한 자연속에서 휴식을 취하며 쉴 수 있었던 곳으로서 
옛 궁녀들이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무너미>
무넘기, 무넘이
강북구 수유동에 있던 마을로서, 무너미는 水踰의 풀이로 
우리말로는 물이 넘친다고 하여 무너미라고 하였으며 
웃무너미와 아랫무너미로 나뉘어져 있었다.

<무수리>
고려와 조선 시대, 궁중에서 잡일을 맡아보는 여자 종을 이르던 말.
주임무는 물긷기·불때기 등 여러 가지 허드렛일이었고, 
무엇보다도 물긷기가 중요했으므로 수사라고도 불렀다. 
옛날 궁중에는 전각마다 밖에 우물이 있어 물을 길어나르는 일이 큰 일이었다. 
물긷기 외에도 각기 그 처소의 담당업무에 따라 막일은 전부 이들이 맡았다.
무명에 아청색(붉은빛이 나는 검은색) 물을 들여 
아래위를 똑같은 색으로 입었기 때문에 우중충한 차림이었다. 
머리는 방석같이 둥글게 틀어올리고 
치마 중간에 같은 천으로 널찍한 허리띠를 매고 앞에는 패를 찼다. 
이 패는 조석 통근과 각 별궁 사이를 심부름으로 무상출입하는 신분증과 같은 것이다.
이 당시 나인들이나 양반부녀자들의 복식은 
'동그래저고리'라 하여 
저고리 길이가 몹시 짧았는데, 
이들의 저고리는 머슴의 옷같이 긴 것이 특징이었다. 
이들은 민간의 아낙네들 중에서 
나인들의 소개로 궁을 출입했으며 대개 기혼녀였다. 
무수리는 궁 밖으로 출입하기 때문에 
어릴 적에 궁중에 들어와서
관례를 치른 궁녀와 구별되는, 
궁 밖에서 도와주는 하녀라 할 수 있다. 
사회적 신분상으로도 하층에 속했다

<경주김씨>
김알지를 시조로 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성씨 중 하나. 
현존하는 경주김씨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셋째 아들 김명종과 넷째 아들 김은열로부터 시작되었다. 
김명종을 중시조로 하는 영분공파와 김은열을 중시조로 하는 은열공파 외에, 태사공파, 판도판서공파, 장군공파, 호장공파 등 10여 파로 나뉘어 계승되었다. 
<삼국사기>를 지은 고려시대 문신 김부식, 조선의 서예가이며 실학자인 추사 김정희, 구한말의 총리대신 김홍집 등이 경주김씨의 후손이다. 
집성촌은 경상북도 경주시, 울산광역시, 전라북도 임실군, 충청남도 보령시 등 전국에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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